🌿 얼굴이 맑아졌다는 말을 들었다

강화에서 시작된 나의 지역살이 기록 ①

1. 맑아진 얼굴

“요즘 얼굴이 맑아진 것 같아요.”
등굣길에 만난 엄마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면 한적한 길가에서 발목부터 목까지 스트레칭을 한다.
그게 하루의 시작이다. 몸이 풀리면 5km 달리기를 한다.

도시에서 5km는 멀게 느껴지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도로 옆에는 차에 눌려 가죽만 남은 뱀이 있고, 저수지 둑에는 낚시꾼이 앉아 있다.
모종 파는 집 앞을 지나며 ‘이제 양파 심을 때구나’ 깨닫고,저수지에 비친 산의 색으로 계절을 느낀다.

걷고 뛰는 동안 5km는 금세 사라진다.

8월 중순에 이사 와서 아직 한 계절밖에 보지 못했다.
강화의 봄, 여름, 겨울은 어떤 얼굴일까.
천천히 알아갈 일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큰 결심 했네요.”
그 말이 틀리진 않다.
나에겐 자기 돌봄이 필요했고, 아이의 농어촌 유학이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핑계라고 쓰고, 용기라고 읽는다.

2. 이웃과 공동체

나는 면소재지에 산다. 문을 닫은 가게가 더 많지만, 그래도 가게들이 있고, 사람 보기 힘든 만큼 아이를 보면 인사해주고 예쁘다 해주는 분들이 있다. 솔직히 바로 옆집, 뒷집 이웃은 잘 모른다.

대신 자연과 함께 아이의 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진강산 교육공동체 사람들, 양도면 능내리에 있는 자람도서관 사람들이다.
‘도서관과 함께 자라는 마을, 마을과 함께 자라는 도서관.’
그곳은 환대와 연결을 소중히 여긴다.

내겐 이런 커뮤니티가 더 각별하다.
동생이 조현병과 발달장애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함께 사는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내게 공동체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균형을 배우는 자리다.
가끔은 큰나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곳은 커피향보다 이야기 향이 진하다. 서로의 일상과 고민이 스며드는 공간이다.

동네 곳곳에서는 작은 모임들이 열린다.
그중 하나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청개구리 장터다.
동네 잔치처럼 사람들이 모이고, 가면 맛있는 한 끼도 대접받는다.
가을이 되면 여기저기서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고구마, 상추, 수확 후 남은 포도까지 먹거리가 풍성하다.

그런데 지갑이 없어도 된다.
그냥 준다. 다 준다. 심지어 맛있다.
이런 호사를 누리는데 돈이 들지 않는다.
이게, 지역 살이의 여유다.

3. 자람도서관과 강화의 책들

자람도서관은 공동체의 중심이다.
‘도서관과 함께 자라는 마을, 마을과 함께 자라는 도서관.’
환대와 연결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곳이다.

2012년, 초등학교 교사였던 초대 관장이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작은 도서관은 이제 마을의 거실이 되었다. 책을 읽고, 생일을 축하하고, 환갑잔치도 함께 연다.

그곳이 관계의 도서관이라면,
내가 책을 신청하는 곳은 행정이 운영하는 강화군 공공도서관이다.
매달 세 권씩 ‘희망도서’를 신청한다.
그 덕에 도서관 서가에 내 흔적이 하나둘 늘어난다.
도시의 대형 도서관처럼 방대하지 않지만, 한 권 한 권이 손에 닿는 느낌이 있다.
섬의 도서관이 주는 온기가 그렇다.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석양이 아름답다는 적벽사도 친구가 추천해줬다.
언젠가 마음이 맞는 친구가 놀러오면, 그곳의 빛을 함께 보고 싶다.
누군가와 나누는 풍경은 언제나 더 오래 남으니까.

4. 강화의 일상

이곳에서는 주차 스트레스가 없다.
대중교통은 불편하지만, 어디든 30분 안에 닿는다.
주유비는 조금 더 들지만, 삶의 여유는 훨씬 크다.

캠핑장 예약에 매크로를 돌릴 필요도 없다.
온통 자연이 캠핑장이다.
마시멜로가 생각나면 그냥 불멍을 하러 나간다.

11월 5일, 올해 가장 크고 밝은 슈퍼문이 떴다.
빌딩 사이로 보던 달이 아니라, 천문과학관에서 망원경으로 본 달이었다.
차로 15분 거리, 그 짧은 이동만으로 세상이 달라졌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지도에 하나씩 표시해 두었다.
가을이면 분홍빛으로 물드는 칠면초 군락지,
가을 들녘을 걷기 좋은 계룡돈대.

강화는 자연만큼이나 역사의 무게가 깊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강화도조약의 흔적이 남은 땅.
서울의 길목이자 나라의 방패였던 곳을 천천히 알아가는 중이다.

5. 도시에서 강화로

나는 서울에서 일했고, 인천 도심에서 살았다.
출근길엔 회색 빌딩 숲을 지나고, 퇴근길엔 아파트 불빛 속으로 들어갔다.
편리했지만, 어쩐지 늘 바빴고, 쉬어도 쉬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도시의 장점으로 ‘선택의 폭’을 말한다.
문화, 맛집, 공연, 쇼핑.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을 다 누리며 살진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서는 ‘있는 것’을 제대로 누린다.
밤하늘의 별, 이웃의 인사, 마을 도서관의 조용한 공기.
그 단순한 것들이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문화생활의 다양성은 솔직히 없다.
하지만 도시에 살 때도 ‘다양했다’는 말뿐, 정작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적은 것을 깊게 누린다.

12월엔 강화에서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공연이 열린다.
무료다.
도시에선 ‘언젠가 보자’ 하며 지나쳤던 공연을 이제는 놓치고 싶지 않다.

배달 음식은 많지 않다.
덕분에 해 먹는다.
건강한 음식을 의식적으로 챙기지 않아도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까.